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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일반자료마당

고암 이응노의 집

by 풀나무사랑 2014. 8. 29.

 

 

 

이응노의 집 돌아온 혼백을 맞이하는 고향집

자료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76&contents_id=65516

 

충청남도 홍성에 있는 ‘이응노의 집’ 전경. Ⓒ건축사진가 김재경

가깝게는 한용운과 김좌진, 멀리는 최영 장군과 성삼문까지, 충남 홍성이 낳은 인물 중에는 유독 원칙과 소신에 목숨을 바친 이들이 많다. 홍성이 배출한 사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이 화가 고암 이응노다. 그 역시 남들은 가지 않은 힘들고 어려운 길을 평생 걸으며 순탄치 않은 일생을 보냈던 이다.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이 거장은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 이후 예산과 서울을 거쳐 일본에서 공부한 그는 미대 교수가 되어 일찌감치 한국의 주요 작가로 떠올랐다. 프랑스로 건너가 당시 한국인으로선 실로 드물게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그는 환갑을 지난 60대에 접어들며 전혀 예상 못한 운명과 마주치게 된다. 분단국가의 예술인으로 태어난 까닭에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냉전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겪은 비운의 예술가

고암 이응노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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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은 1967년 한국은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휘말려 한국으로 끌려갔다. 수많은 문화예술인, 학자와 유학생들에게 간첩과 만났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작곡가 윤이상은 무기징역, 이응노는 징역 3년을 선고받는 등 모두 34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이후 대법원에서 간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영구 집권을 노리던 박정희 정권이 간첩 사건을 조작해 여론 몰이 정치 공작을 하려던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 이 사건은 지금까지 그 진상은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고, 그 피해자들은 ‘빨갱이’란 낙인이 찍혀 가혹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응노 화백은 이후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1989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응노 화백은 개인의 인생이 곧 한국 현대사였고, 냉전 시대의 질곡을 그대로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개인적 고초를 극복해가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미술 세계를 일궜다는 점에서 한국 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가 타계한 뒤 고국에는 그를 기리는 두 건축물이 들어섰다. 대전에 2007년 이응노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고향 홍성에는 2011년 그의 생가 기념관인 ‘이응노의 집’이 완공됐다.

모두 한국 현대건축에서 주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두 건물은 사뭇 다르다.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엥이 이응노 화백의 ‘문자 추상’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얻어 설계한 이응노미술관은 대전 시내에 있는 건물답게 현대적이다. 죽죽 뻗은 수직 수평 구조체들이 교차하는 지붕이 강력하게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반면 홍성 이응노의 집은 전원 속에 들어간 작고 소박하고 차분한 건축이다. 그럼에도 다른 건물에선 만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장면들과 이야기를 그 안에 품고 있다. 여러 가지 건축적 가치를 담아낸 점을 높게 평가받아 2013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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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있는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엥이 설계한 ‘이응노 미술관’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충남 홍성에 있는 조성룡 건축가가 설계한 ‘이응노의 집’ Ⓒ건축사진가 김재경

이응노의 집은 홍성군이 고암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추진하여 설계 현상으로 당선작을 뽑았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미술관 등 문화시설 설계 경기는 유명 건축가들에겐 오히려 피하고 싶은 일이자, 당선되기도 어려운 뜨거운 감자다. 건축주는 시민들이어도 발주처인 지자체의 간섭이 심하고, 새롭고 문화적인 시도보다는 공무원 입맛에 맞는 엇비슷한 건물만 주로 지어지는 탓이다. 이런 실정 속에서 이응노의 집이 지역 공공건축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을 들으며 2010년대 한국 현대건축의 주요작으로 탄생한 것은 당선자가 조성룡 건축가였던 덕분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 건축가인 조성룡 성대 교수는 한국에서 공공건축에 가장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온 건축가로 꼽힌다. 건축이 지녀야 하는 공공성과 공동성을 집요하게 추구해왔고, 특히 미술관 건축을 많이 설계했다. 광주 의재미술관, 서울올림픽미술관에 이어 그가 선보인 이응노의 집은 단숨에 그의 대표작 미술관 중 하나가 됐다.

이응노의 삶과 기억을 찾아서…

화려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은 건물이지만 설계 조건은 어려웠다. 그 이유는 이응노 화백이 태어난 곳이었어도 그 흔적은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홍북면 중계리 홍천마을에 있던 생가는 사라졌고, 주변 땅 모양은 비록 농지로 계속 이어져왔지만 화가가 살던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화가가 1940년대 그린 고향 초가집과 주변 풍경 그림뿐이었다. 게다가 미술 공간인데도 전시하게 될 소장품은 극소수였다. 건축물 자체로 이응노를 상징해야 하는 조건이다. 게다가 건축 부지는 7,000평으로 실로 넓은데, 실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은 예산상 300평 남짓. 건축가가 풀어야 할 고민거리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7천여 평이라는 넓은 부지에 자리잡은 건축물 Ⓒ건축사진가 김재경

건축가가 주목한 것은 ‘기억’이었다. 고암의 생가 터에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고암의 기억이었다. 고향 땅은 고암에게 자기 예술의 모든 원천이었다. “예술은 자신의 뿌리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나는 충남 홍성 사람입니다.” 타계 직전인 1988년 고암이 남긴 말이다. 고암은 자기 예술에 중요한 것들을 모두 고향 땅에서 얻었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도시도 아닌 시골 농촌에서 어린 소년이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타고난 운명인 동시에 실로 어려운 도전이었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방해하려고 하였다.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1971년 파케티 갤러리 개인전 도록 서문 중

건축가는 외롭게 그림을 그리던 소년의 눈에 비쳤을, 훗날 그에게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을 고향 마을의 풍경을 되살리고 싶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응노란 사람의 인생 자체였다.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가 관통하는 그의 인생을 논하지 않고 그의 예술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기념관은 이응노의 삶을 건축으로 이야기하는 집이어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 모두 이응노 선생에게 진 빚이 있습니다.”조성룡, 2011

이응노, [향원정], 1959년, 종이에 수묵담채, 124×172cm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건축가는 고암의 글과 그림을 보고 고향 마을 풍경을 들여다보며 고민을 거듭했다. 개념을 정하기가 유독 어려웠던 설계를 풀어준 실마리는 ‘땅’ 그 자체였다. 홍성을 대표하는 두 산인 용봉산과 월산(또는 일월산) 사이에 있는 넓은 마을 땅으로 이응노를 다시 불러내는 ‘회상의 건축’, 그리고 이응노의 기억 속 풍경을 재현하는 ‘회복의 건축’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응노의 기억 속 풍경을 재현한 회복의 건축

건축가는 옛 지적도와 자료를 뒤졌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구획정리되기 전, 고불고불하고 부드럽게 논밭이 펼쳐지던 땅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60년대 지도를 보면서 논두렁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이 흔적에 가깝게 땅 흐름을 복원하는데 초점을 뒀다.

주인공은 풍경이고, 건축은 그 풍경의 일부로 들어갔다. 건축은 처음부터 주연이 아니라 조연을 자처한 것이다. 언제나 건축을 품는 경관 전체를 추구하는 조성룡 건축의 특성은 이응노의 집에서 더욱 극대화됐다. 그리고 선유도공원에서 보여줬듯 조경과 건축의 조화를 중시하는 그의 또 다른 특징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1980년대 아시아선수촌아파트를 설계할 때 같이 일했던 조경가 정우건씨가 조경을 맡아 집과 풍경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연출했다.

기념관 건물 자체의 난제는 작품 컬렉션 자체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전시가 열리게 되기에 전시 공간은 필요했다. 주로 작은 전시가 열릴 것으로 예상해 건축가는 전시 공간을 작게, 그리고 잘게 쪼갰다. 긴 주 공간 한 개와 짧고 작은 딸림공간 네 개가 분절되어 흩뿌린 듯 비정형으로 배치됐다. 다섯 조각 건물들은 보는 방향과 지붕 각도가 조금씩 다르지만 모든 축선은 마을의 배경이 되는 용봉산과 월산에 맞춰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외부는 모두 똑같이 흙으로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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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바라본 미술관, 5개의 공간이 서로 떨어져 비정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축사진가 김재경

‘흙’에 목숨을 바친 전문가, 정기용에 대한 오마주

이응노의 집이 주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 중 하나가 이 흙마감 기법이다. 고 이종호 건축가가 설계한 아산 이순신기념관과 함께 2000년대 한국에서 흙을 주요한 건축 재료로 활용한 드문 사례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 재료인 흙은 현대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사라진 소재다. 이 흙을 현대건축에서 되살리려 가장 노력했던 이가 영화 [말하는 건축가]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고 정기용(1945~2011)이다. 흙이 지닌 자연 그대로의 느낌,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성에 주목한 정기용 건축가는 평생 흙 건축을 연구하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 마을 사저 등에서 흙마감 기법을 선보였지만, 실제 대규모로 흙을 활용한 건물은 남길 기회를 얻지 못 했다.

정기용 건축가와 건축계의 소문난 단짝이자 동반자였던 조성룡 건축가는 정기용을 통해 접하게 된 흙건축을 이 건물에 시도했다. 당시 암 투병으로 임종을 앞둔 평생의 지기에게 흙 건축으로 오마주한다는 뜻도 담겨있었다.

정기용 건축가의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정보 보러가기

흙은 현대 건축에 쓰기엔 아주 까다롭다. 물기에 약하고 관리가 어려운 탓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한국에선 여름철 비에 젖는 것 못지잖게 겨울철 흙 안의 물기가 얼어 균열을 만드는 문제도 심각하다. 시공에 필요한 각종 자료들도 거의 없다. 시공할 때도 단순히 흙을 외벽에 붙이는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최대한 단단히 다져야 하고, 그렇게 해도 몇 년마다 관리 보수를 해줘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른다.

건축가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흙 건축을 결정했다. 이응노의 집이 땅과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건축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고, 농촌 풍경 속에서 현대 건물이 시각적으로 공존하기 위한 방법이라 판단했다.

흙마감 시공은 고 신근식씨가 맡았다. 그는 정기용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흙을 오래 연구했고, 건축 전공자들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흙 건축 시공을 자기 길로 정했던 전문가이자 선구자였다. 이응노의 집은 외벽을 모두 50cm 두께로 흙을 덮었다. 표면에 드러나는 가로줄 무늬는 흙을 한번 다질 때마다 생긴 것으로, 그 줄을 세보면 모두 몇 번에 걸쳐 흙을 다져쌓았는지 알 수 있다. 이응노의 집 시공을 마친 얼마 뒤, 신근식씨는 다른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함께 흙 건축에 매진했던 스승 정기용 건축가가 타계한 바로 그 해였다.

포근한 외관과 대조되는 콘크리트 내부

흙으로 마감했기에 이응노의 집은 완만한 언덕 위에 흙덩어리가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옆에는 생가 초가집이 복원되었는데, 기하학적 형태가 두드러지는 현대 건축인 기념관과 전통 한옥인 초가집이 마치 한마을을 이룬 것처럼 조화를 이룬다. 기념관 전시실을 잘게 쪼개 덩치가 비슷하고, 모두 흙으로 마감해 색깔이 통일된 덕분이다.

대신 건물 내부에선 반전이 일어난다. 흙마감이어서 포근하고 덩치가 작아 만만했던 기념관은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강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묵직하게 방문객을 감싼다. 건축가가 의도한 것은 ‘낯섦’이었다. 온통 콘크리트만 보이는 내부 공간의 낯선 분위기가 건축가가 추구한 기념의 방식이자 이 기념관의 핵심이다.

콘크리트를 내부에 그대로 드러낸 것은 이응노라는 예술가가 이데올로기 논란에 휘말려 겪었던 황당하고 슬픈 고통의 시간을 상징한다. 우리 시대의 아픔을 상징하는 인물을 마음 편하게 평화롭게 만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차가움과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이 진입 공간이 이응노를 표현하고 기념하는 곳이다. 잠시 먹먹해지면 그다음에는 긴 건물 사이사이로 빛이 보인다. 산에 맞춰 동-서 방향으로 낸 축을 따라 중간에 틈을 낸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시간을 따라 서서히 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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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외관과 대비되는 콘크리트 내부 Ⓒ건축사진가 김재경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전경

이응노의 집은 이런 특징 때문에 즐기는 방법이 다른 건축물보다 다양하다. 우선 건물을 만나는 길이 두 갈래다. 일월산 방향으로 진입하면 저 멀리 산이 보이다가 길이 휘어지면서 건물이 슬쩍 나타난다. 반대편 길은 마을 입구에 들어가듯 굽은 길로 생가를 먼저 만나는 동선이다. 예전 마을 사람들이 오가던 길을 그대로 남겼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든 나올 때 반대편으로 가면 같은 건물, 같은 땅의 느낌이 달라진다.

또한 이 집은 건물만 보면 절반도 보지 못한 셈이 된다. 너른 앞마당을 거닐어야 땅과 집의 관계가 보이고, 그 아래 연못 위로 뻗은 산책로에서 보면 경관이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

여러 채로 나눈 건물은 모두 단층 짜리다. 요즘엔 오히려 드물어진 단층 건물은 땅과 바로 맞닿는 느낌이 더 뚜렷하다. 집 바로 뒤 언덕에 올라가면 다섯 개 낮은 지붕들이 서로 다른 각도로 엇갈리며 모이는 또 다른 모습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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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집에서 너른 앞마당으로 통하는 길 Ⓒ건축사진가 김재경

주위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 Ⓒ건축사진가 김재경

이응노의 집은 땅의 기억을 살리고, 한 예술가의 기억과 그 고향 땅의 추억을 회복하고자 한 건축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땅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 있는 법이고, 이 진리를 자연과 건축을 하나로 엮어 표현하려 했다. 그렇게 기억과 인간과 땅을 옛 모습으로 되살려 드러내려한 이곳 전체를 아우르는 말은 아마도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움이 완성되는 과정은 결코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건축가는 6년 넘게 이 일에 매달려야 했고, 그 사이 담당 공무원은 다섯 번 바뀌었다. 사업 초기에는 왜 좌파 예술인 기념관을 짓느냐는 논란이 나왔고, 설계안이 나온 다음에는 건물이 너무 소박해 폼이 나지 않는다며 디자인을 고치라는 지역 정치인들과 일부 주민들의 요구가 불거졌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야 이응노의 집은 고향을 떠난 지 90여 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은 지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고암의 혼백을 다시 맞이할 수 있었다.

건축물 안내
  • 건축명 이응노의 집
  •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이응노로 67-1
  • 면적 대지 2만 596㎡(7,853평), 건축 연면적 1002㎡(303평)

구본준 | 건축 칼럼니스트, 한겨레 기자

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알리는 글을 오래 써왔다. 지은 책으로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두 남자의 집짓기』 등이 있다. [한겨레]에서 대중문화팀장, 기동취재팀장, 기획취재팀장 등을 역임했다.
사진 제공
김재경 건축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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